본문 바로가기
전공의 흔적

인프피(infp)를 위한 추천도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2021. 4. 23.

※인프피(라고 대변되는 성향)를 비하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뭐길래?

인간실격을 읽게 된 이유는 진격의 거인 완결 이후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뒤적거렸던 <문호 스트레이독스>라는 애니메이션에 다자이 오사무 캐릭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호 스트레이독스의 다자이 오사무. 정말 잘생기셨어요.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실격의 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뜬금없이 애니메이션에 캐릭터로 등장하다니? 그리고 그 인간실격이 공포 만화로 유명한 이토 준지의 만화로도 발매되었다니? 아니 대체 다자이 오사무가 뉘시길래 이렇게 원소스 멀티유즈 될만큼 인기가 많은 건지 원작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왜 인기가 많은지 알겠다. 이건 인프피를 위한 소설이다.

MBTI 안 믿습니다

나는 MBTI를 믿지 않는다. 혈액형이나 사주처럼 유형명을 가려놓고 보면 이게 infp인지 infj인지 구분할 수 없을만큼 분석 결과가 범용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여름에 물 조심해! 여름엔 당연히 비가 많이 오니까 당연히 물을 조심해야겠죠? 불안감을 조장하는 역술인의 말은 믿지 맙시다) 하지만 실제 MBTI 검사의 신빙성과는 상관없이 성격의 경향성을 찾고 나만의 정체성을 가시화, 유형화한다는 점에서 MBTI가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쨌든 혼자 마음 속으로 MBTI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MBTI를 주제로 대화를 하곤 했는데 이 MBTI 검사에 가장 과몰입하던 친구의 유형이 바로 infp, 인프피이다.

INFP에 해당하는 인구수는 전체 인구수의 약 4%로 상당히 소수다. 하지만 외부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고 스스로의 성격과 개인적인 영역에 관심이 많은 INFP 성향상,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다른 유형보다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격이다. 특히 덕후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INTP, INFJ와 함께 약방에 감초처럼 흔하다. 그리고 셋 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선 비틱이라고 까인다. 그래서인지 나무위키의 MBTI 성격유형 문서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자랑한다.

출처: INFP 유형 특징 총정리
- 중재자라는 별명답게 완숙되어 가는 INFP는 타인과의 교섭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이는 사실 본인이 마음으로 이해해서가 아닌 본인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최소한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주며 맞춰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
- 직접적으로 주목 받는 일에 관심이 없다. 막상 주목 받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래도 은근히 명예에 대한 욕구는 마음속으로 있다.

- 내면적으로 관심을 받고 싶어한다. 인터넷 상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컨셉을 지어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 공상적이어서 중2병스러운 외모, 말투, 행동을 선호하는 등 판타지적 요소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이 이해하기 힘들거나 잘 알지 못하는 추상적인 단어나 명언 등을 선호한다. 한마디로 4차원스럽다.
- 비판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부분 개인적인 관점에서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가치보다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성향이나, 타인의 사생활에 참견을 하는 성향은 없다.

- 상대방을 배려해서 빙빙 돌려서 은유적으로 의사 표현한다.
- 대인 관계에서 트러블이 생기면 밤을 새워 곱씹다가 병이 나는 수가 있다.
- 내향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성향으로 인해 타인한테 상처를 주기 보다는 본인이 상처를 받는 입장인 경우가 더 많다.


출처: INFP 유형 특징 총정리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infp라는 성향의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편 이처럼 이상주의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면서도 내면적인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프피의 성향이 인간실격에서 묘사된 주인공 요조의 모습과 유사하여 '만약 요조가 MBTI 검사를 한다면 인프피이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17p)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p) 또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대꾸는커녕 그 꾸중이야말로 말하자면 만세일계,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이 저에게 욕을 하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되어서 언제나 그 공격을 잠자코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미칠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27p)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93p)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이런 다자이 오사무의 성향을 두고 동시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냉수 마찰이나 기계 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만 하면 치유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정신 질환이 운동으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나는 이 인간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고, 다음으로는 이 인간의 시골 촌뜨기 같은 하이칼라 취미가 싫고, 그 다음으로는 이 인간이 자기와 안 어울리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 짜증난다."와 같이 극렬한 불호를 드러냈던 것을 보면 오히려 미시마 유키오의 발언은 동족혐오 혹은 시기·질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자이도 "그렇게 싫으면 안 오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하곤 그를 외면해버렸다고 한다)

왜 인프피 추천도서인가

글의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이건 인프피를 비하하(돌려까)는 의도의 글이 아니다. 사람의 성격이라는게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지속적으로 변화할 뿐 아니라 다면적이어서 하나의 유형으로 정의내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오히려 인프피로 대변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공감하고 위로를 전하기 위함이다.

나약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면서도 순수하고 무구한 것을 갈망하는 요조의 모습은 가치관의 혼란, 세대간의 갈등, 극단적인 대립 구조가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요조의 방식이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멸망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파멸"(에토 준,<다자이 오사무>,1963)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다자이 오사무가 인기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13p)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통보다 조금 더 예민해서 인간의 자격을 실격당한 요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점에서 보통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


다 하지 못한 말

+가수 요조가 예명을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요조님 MBTI가 궁금해지는 시점.
+이어서 볼 것: 이토 준지 <인간 실격>, 영화 <인간 실격>
+요즘은 읽으면서 저자나 책 속 화자에게 대화를 걸게 되는 책이 재미있다. 인간 실격도 속으로 '이건 좀 아니지' 라던가 '그래 그럴 수 있어' 라고 계속 생각하면서 읽었다.
+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