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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흔적

중2병과 감성 사이: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

2021. 5. 4.

작성일자: 2015.11.13 (2nd grade)

곽재용 감독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멜로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감독이다. 특히 그는 아름다운 영상미와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최고인 감독이다.

곽재용 감독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다소 전형적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이야기 속 그들만의 정서를 살리면서 관객들의 감성을 건드린다. 따라서 곽재용 감독은 한국 멜로영화계의 커다란 한 단계 도약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인터뷰에 의하면 그가 추구하는 영화는 지극히 감성적인 영화가 맞다. 그리고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 칭하는 고전적인 멜로 드라마도 역시 맞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는 자신의 영화를 보며 스스로 감동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의 영화에 비슷비슷한 정형화 된 주인공과 장면, 장치들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확실히 과거에 살고 있다. 청춘남녀의 사랑. 그것은 곽재용 감독이 지금까지 추구했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다룰 것이 확실한 분야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젊은 세대의 생각은 변화하고 있다. 3포 세대는 이미 옛말이고 이제는 꿈과 희망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라는 n포 세대이다. 사회, 경제적인 압박으로 옛날의 감성은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감성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중2’스러운 행동이고 ‘흑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가 2000년대 초반 이후로 맥을 못 추는 이유에는 곽재용 감독의 스토리가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감성이라는 키워드는 공감을 불러오기 힘든 소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엽기적인 그녀>
대한민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꼽자면 절대 빠지지 않는 영화가 바로 <엽기적인 그녀>이다. <엽기적인 그녀>는 개봉한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로맨틱 코미디계의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전지현은 이 영화로 단번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으며 <엽기적인 그녀>는 여전히 전지현과 차태현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엽기적인 그녀>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전지현의 엽기적인 행동과 차태현의 어리버리한 모습에 의한 유머요소도 있지만 연애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연애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춘남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연애이기 때문이다.

남자주인공 견우는 긴 생머리의 청순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거나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하는 그녀를 질색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얌전하고 청순한 여성상을 그리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당찬 성격에 반하고 마는데 이는 어려서 견우를 여자아이처럼 기른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여성적으로 양육된 그는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외모가 청순한 여성을 찾지만 결국 남성적이고 리드하는 여성에게 끌리게 된다.

그들이 헤어진 뒤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견우와 함께 묻은 타임캡슐이 있는 나무를 찾는데 그곳에서 어떤 할아버지에게 나무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된다. 번개 맞아 죽은 나무를 어떤 청년이 너무 슬퍼하여 그곳에 다시 비슷한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면 만나게 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만난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할아버지는 우연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라고 말한다.

그들의 만남은 지하철 속 우연이었지만 이들은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간다. 표면상으로는 그녀가 데이트나 일상의 모든 상황을 리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연의 끈을 이어나간 것은 견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우연과 운명은 동전의 양면처럼 각각 존재하면서도 각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엽기적인 그녀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결말의 반전이다. 이 반전은 영화 속에 계속 복선을 깔아두었는데 고모의 아들과 견우가 매우 닮았다는 점, 그녀 역시 그렇게 이야기 한 점 등이 있었다. 이러한 반전의 장치는 후에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에서도 사용되는 등 결말에서 관객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무림여대생>
<무림여대생> 역시 곽재용 감독의 여주인공 공식에 부합하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만 특이한 점은 여자 주인공 신민아가 무술을 한다는 사실이다. <엽기적인 그녀>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도 왈가닥이고 깡다구 넘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였지만 무림 여대생에서는 아예 여자 주인공이 무술 뿐 아니라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다. 또한 이전과 같이 소휘 역을 맡은 여자 주인공 신민아의 청순한 이미지가 가장 돋보이는 구성을 유지한다.

큰 주제는 사랑에 빠져 무술을 그만두려하는 소휘에게 닥친 무림의 위기이지만 곽재용 감독은 무술보다는 청춘남녀의 사랑과 웃음이다. 무술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긴장감과 박진감을 포기하면서 곽재용이 묘사하고자 한 것은 무술밖에 모르던 소휘에게 찾아온 사랑과 이를 지키고 싶은 소휘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무림여대생>의 사랑과 웃음은 곽재용 감독의 이전 작품들의 속편인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클래식에서와 같이 비가 내리고 두 남녀 주인공이 겉옷을 쓰고 빗속을 달린다. 또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카메오로 출연한 차태현이 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지나친 반복이었다. 이처럼 무림여대생은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미스 히스테리>
곽재용 감독은 엽기적인 그녀의 일본, 미국 리메이크 이후로 몇 년 전부터 중국과 일본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하였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 <미스 히스테리>(나의 여자친구는 조기갱년기)라는 영화이다.

<미스 히스테리>는 중국 최고 인기 배우인 저위쉰과 통따웨이가 남녀주인공을 맡아 중국 내에서도 기대가 큰 작품이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역시 <엽기적인 그녀>의 중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전개이다.

남자친구에게 용기내서 프로포즈 했지만 거절당한 충격으로 조기갱년기 증후군에 걸린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일편단심 짝사랑해온 동창인 남자 주인공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남자, 여자 주인공이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와 그녀를 연상케 한다. 오랜 시간 치지아를 짝사랑해왔고 그녀를 챙기는 웬샤오오우는 어리버리 하지만 착하디 착한 견우를 떠오르게 하고 조기갱년기증후군이라는 병을 가진 치지아의 행동은 다소 괴팍하고 엽기적이던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미스 히스테리>는 곽재용 감독의 과거 엽기적인 그녀나 클래식처럼 기억에 남을만한 인상적인 장면이 없는 무난한 중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다. 대개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은 보통 정형화 되어 있지만 그 전개에서 로맨틱 코미디만의 특징과 개성이 살아나는데 미스 히스테리에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그만의 개성이 부족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곽재용 감독은 자신의 아시아 진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중·일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국가의 관객을 만나고 싶습니다. 공백이 길었던 만큼 연출 욕구가 큽니다. 여러 나라 관객을 접하다보면 모두가 좋아하는 흥행 코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는 아시아인들의 감성을 믿는 감독이다. 이는 곽재용 감독만의 사랑과 청춘남녀의 감성이 경쟁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드라마의 열풍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이제 <엽기적인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엽기적인 그녀의 중국판 스토리로 자신의 영화를 중국 시장에 첫 선을 보였다면 이제는 더 나아가서 그만의 감성을 살리고 세련된 전개를 갖춘 로맨틱 코미디를 보여줄 때인 것이다.

한국 시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거에 비해 사회, 경제적 어려움에 치여 비교적 감성보다는 이성과 현실을 추구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도 ‘사랑’은 존재한다. 요즈음의 그 ‘썸‘이라는 애매모호한 관계역시 결국 현대인의 사랑의 다른 모습이리라. 곽재용 감독만의 그 원초적인 감성은 살리되 우리 사회와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 역시 적절히 반영하여 ’그래도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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