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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흔적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21. 5. 11.

작성일자: 2015.12.03 (2nd grade)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쓴 해원과 선희의 이야기

현대에 들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명제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는 주체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흔히 누군가의 “걔 어떤 사람이야?” 라는 물음에 쉽게 “조용한데 친해지면 좋은 애야” 라고 답하지만 누구도 ‘걔’의 진짜 모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 아이는 아마 다른 곳에서는 말이 많고 불친절할 수 있다. 존재들은 그 무엇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서로 다른 존재들에 의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관계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선희'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같은 주체가 등장하고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망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국 ‘그때는맞고 지금은틀리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관찰의 미학을 가진다.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업적 영화라고 여기는 영화들은 배우들이 극중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과 이야기의 사건, 갈등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면 홍상수 감독 영화의 배우들은 그 자체가 마치 영화 속 실제 삶을 사는 주체로 보여 진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주인공에 대한 주변인들의 시선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주변인들이 욕망하는 주체와 그 주체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 속에서 관찰되는 욕망과 주체 탐구에 대한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내가 일치하지 못하는 인물의 일상을 주변인들의 분열된 욕망을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주체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멋있어 보이지만 깃발의 펄럭임으로 인해 바람의 존재는 드러나고 만다. 내고 싶은 만큼만 내면 된다는 헌책방에서는 내가 내는 돈이 나를 드러낼 것만 같다. 해원은 카페 낙서장에조차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해서 증명하려 하는 존재이다. 그녀는 모든 순간에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모든 순간에 그녀의 감정들, 모습들이 드러나고 만다. 그것은 그녀가 그 자체로 투명하게 비추어지는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를 학교 친구들은 그녀가 특별하다는 말 아래에 추측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성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모면하기에만 급급한 찌질남이다.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길가다 만난 미국 대학 교수와 대화를 하고 남한산성에서 친한 언니 커플과 등산하고 다친 성준을 만나는 등의 모습을 통해 해원의 무의식적 욕구는 꿈속에서 실현되는 듯 보인다. 그녀의 욕망이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실현되는 이유는 진짜 그녀에 대해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명 배우, 엄마, 성준, 친구들, 대학 교수 등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이쁘다는 찬사를 보내지만 그녀는 자신을 나쁜 사람, 악마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남한산성에서 만난 등산객만이 그녀를 이해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 영화의 다른 주인공들과는 조금 다르게 자신의 주체를 찾으려 하면서도 당차고 투명하고 솔직한, 착한 그녀는 그 누구의 딸도 애인도 친구도 동생도 아닌, 해원 그녀 자체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 선희
선희는 영화 찍는 것 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세 남자를 들었다 놨다하는 여우같은 여자다. 그리고 세 남자는 저마다 나름대로 선희에 대해 정의한다. 그들은 선희에 대해 서로 비슷하게, 거의 똑같이 정의한다. 그들에게 선희는 내성적인데 솔직하고 어떨 땐 또라이 같기도 한데 똑똑하고 순수하고 이쁘고 안목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런 선희는 남자들에게 비집고 들어올 틈을 보여주는‘착한’ 아이이다. 먼저 불러놓고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해준다며 가버리고 조용하고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추천서를 써준 교수에게도 다시 써달라며 술을 얻어먹고 선배에게는 당신이 이쁘다고 말 해놓고 앞으로 남자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희는 자신의 목적인 추천서를 받아서 사라져버린다. 그 곳에는 멍청한 남자 셋만이 남는다. 선희는 누구의 선희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욕망하던 선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극중 영화학도인 여학생은 이렇게 묻는다. “감독님은 사람들도 이해 못하는 영화를 왜 계속 만드는 거예요?”"… 제가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과정이 나로 하여금 계속 뭔가를 발견하게 하고 저는 그거를 그냥 수렴하고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 뿐 입니다. 그 결과물을 보고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나 아무도 뭐 이해 못할 수도 있겠죠. 저는 이 세상에 귀중한 거는 다 공짜로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고 싶은 겁니다." 홍상수 감독은 경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영화관을 말했다. 영화의 완성은 감독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몫이라는 것. 다만 감독은 관찰한 결과물을 한데 수렴할 뿐이다.

관객들은 일반적인 영화 속 주인공이 정의 넘치는 선한 인물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이선균을 보며 그가 찌질해서 비웃으면서도 쓰게 공감한다. 우리가 보통 영화에서 기대하는 인물상은 이상적이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지극히 속물적인, 그래서 더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의 영화에서 찌질한 캐릭터들을 바라보기 민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치 나의 추하고 보잘 것 없는 진짜 속내가 드러나 버린 듯한 거북함.

그러나 우리는 이상만을 쫓다가 자신을 잊고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괴로워하고 모순된 인간이 되기도 한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 뿐 아니라 내면의 구김살 역시 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나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이상보다는 구김살을 가진 현재 내 모습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주목해야 한다.

홍상수 감독은 어떤 주제 의식을 가지는 영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 명확한 주제 의식이란 영화의 일방적인 ‘당김’으로 여겨진다. 그는 영화의 입체적인 어떤 ‘밀고 당김’을 추구한다. 오늘과 내일의 감상이 다른,‘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린’것과 같이. 그리고 이 ‘밀당’은 내 안의 나, 주체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작업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각각의 처지와 마음상태에 따라 영화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영화를 다르게 해석하고 그 중에는 지나치거나 틀린 해석도 존재한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괜찮다. 애초에 지나치거나 틀린 해석은 없다. 사실은 ‘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나 ‘우리 선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참고논문

<초창기 홍상수영화의 서사방식에 대한 논의-구조주의 영화의 관점에서> 김수남 청주대학교 영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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