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공의 흔적

순간과 영원 사이: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

2021. 5. 25.

작성일자: 2016.12.02 (3rd grade)

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 패전 이후 199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중국 문화권에 속하면서 동시에 중국에 흡수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중국 대륙의 문화, 홍콩 자국의 문화, 영국과 여러 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홍콩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홍콩은 식민과 반환을 거치며 오히려 독립적인 공간으로 거듭났고 제국주의나 중국의 사회주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홍콩은 외지인들에게는 무한한 기회의 도시이자 현지인들에게는 고독한 무정형의 공간이다.

이는 홍콩인들의 독자적 정체성 형성에 의한 결과이다. 80년대 홍콩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주해 온 대륙인들을 무시했다. 심지어 그들 자신이 외지인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홍콩사람들은 이미 중국인이면서 중국인이 아닌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66년 문화 대혁명 이후 홍콩인들은 중국을 낙후되고 민주화 되지 않은 본토로 인식하게 된다. 홍콩을 대륙과 분리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홍콩 반환은 기존 중국 대륙으로의 회귀라는 측면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홍콩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중국대륙에 속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90년대는 대륙으로의 반환에 대한 불안감과 혼란이 존재하는 시기였다.  

과거 홍콩인들에게 영국으로부터 반환을 약속한 1997년이 있었고 현재 그들에게는 중국령으로 귀속을 의미하는 2046년이 있다. 그래서인지 왕가위의 영화에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아비정전>은 순간의 시간과 영원을 이야기한다. 흔히 시간은 흐른다고 표현하지만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는 시간이 있다. 이는 과거가 남긴 흔적인 기억이다. 그들은 1분의 순간을 함께하고 영원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다. 과거는 계속해서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들의 1분은 잊혀지지 않고 현재에 영향을 끼친다. <중경삼림>은 사랑의 유통기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애인이 떠나고 보스에게 버림받음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배신이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에 이루어지지 않을 만년의 유통기한을 바라지만 이별 후에도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애인이 떠나고 보스에게 버림 받은 그들은 가발을 벗어 던지고 조깅을 하며 새로운 삶과 사랑, 그리고 과거를 반복한다.

아비에게는 양모와 친모가 있다. 아비는 친모에 대해 알고 싶어 하며 그녀를 만나고 싶어한다. 양모가 미국으로 떠나자 아비는 낳자마자 그를 버린 친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그러나 친모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한다. 그 동안 여자들의 구속을 원치 않아 하면서도 친모의 굴레에 구속되어 있던 아비는 이제서야 친모와 양모, 두 사람으로부터 홀로 설 수 있다.

홍콩은 영국으로부터 반환된 후 중국 귀속까지 50년의 기간이 주어졌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이다. 홍콩의 사례로 보아 한 국가 안에 두 개의 다른 체제가 공존하는 일국양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남북통일에 대한 논의에서 일국양제는 급격한 제도적 통일이 아닌 단계적 통일의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단계적 통일에는 남북한 교류 확대와 통일에 대한 민간차원의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남북한 통일 문제를 다루는데 정책적인 측면의 고려도 있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주체적인 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현재는 과거의 반복이다. 그렇지만 반복된 과거는 영원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현재를 낳는다. 통일 후에도 남북한은 전쟁 후 분단이라는 과거를 잊지 못할 것이다. 과거는 제도상의 흔적이 아닌 분단과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홍콩이 영국과 중국, 기타 문화들이 공존하는 무정형의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남한과 북한도 어느 한 체제에 귀속되지 않는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남북한의 정체성 혼란과 불안함을 극복한 신 통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

 

 

댓글